축구문화권의 교훈 /유홍준
우리나라가 월드컵 주최국이란다. 신세대들이야 당연히 그런가
보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이 오십을 넘긴 구세대
입장에선 금석지감에 감개무량까지 더해진다.
1958년 스위스 월드컵 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그 무렵
우리나라 스포츠가 해외에 원정경기를 나가면 으레 라디오 중계로
전국민의 관심을 모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5년밖에 안되는
피폐한 상황에서 `대한의 건아'들이 세계를 상대로 힘을 견준다는
사실 자체에서 희망을 찾던 시절이다. 그래서 중계방송 때면
이광재, 임택근 같은 인기 아나운서가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로 시작하는 말로 감성적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그
때 우리집에는 라디오가 없었다. 헝가리와 시합이 있던 날 나는
옆집인 재봉틀집 아주머니가 크게 틀어준 라디오 소리를 돌담
밑에서 동무들과 쪼그려 앉아 들었던 기억이 있다. 경기가
시작되자 아나운서는 “드디어 시작됐습니다. 우리의 센타포드
최정민 선수, 공 잡느냐, 아~, 놓치고 말았습니다. 슛! 골인
됐습니다.” 아나운서는 연신 우리편 선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만 언제나 슛하는 것은 헝가리 선수였고, 결과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월드컵 본선 최대 점수 차인 9대0이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 때 아나운서가 우리 선수 이름을 불러 댄
것은 공을 잡았다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수비가 뚫리는 순서를
말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허망하게 졌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큰 자랑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홍덕영 문지기가
선방해서 그나마 9대0이 되었다는 점이다. 현지에선 한국 문지기
배가 갈라지지 않았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 대한민국이 오늘날 월드컵 주최국이 되어 대망의 16강 진출을
꿈꾸고 있다. 나는 한국 축구의 이런 성장이 결코 공차기만 잘해서
얻은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민주사회 건설을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으며, 성숙한 문화를
일구려고 고군분투해왔다. 그런 경제·정치·문화적 성장없이 공만
잘 찼다면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처럼 본선에는 올라도 월드컵은
주최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문화의 성장이란 이처럼
함께 갈 때 제 힘을 발하고, 제 몫을 해내는 법이다.
월드컵 축구에서 나는 문화권의 힘을 배운다. 월드컵을 주도해 온
것은 유럽과 남미 축구다. 여기에 아프리카 축구가 다크호스로
부상하면서 삼각축을 형성하려고 한다. 미국은 다른 문화는
주도하면서 유독 월드컵에서만은 어떤 문화권적 유대를 형성하지
못해 주변국으로 전락해 있다. 한국, 중국, 일본이 아직도 올바른
동아시아 공동체 문화권을 구축하지 못하는 바람에 함 힘을 받지
못하고 있음과 같다.
내 전공인 미술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세계의 현대미술을 주도하는
것은 미국과 유럽이다. 여기에 한국미술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주도적 흐름 속에 파고들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과 중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월드컵 축구에서 남미와 아프리카가 보여주듯이
한·중·일이 힘을 합쳐 동아시아 현대미술로 재무장한 뒤 미국과
유럽의 그것에 대항하면 그 세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을
일본과 중국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동아시아가 문화적 유대와 결속을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은 최근
1백년간의 불행한 역사경험 때문이다. 이것이 자칫 잘못되면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논리에 함몰될 위험과 의구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동아시아 3국이 문화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깔보거나 잡아먹고 먹힐 입장이 아니다.
나는 한·일 문화교류의 정상화는 두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한·중·일 3국의 관계항 속에서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3국 모두가 세계 문화 속에서 당당한 지분을 갖는 주주로서
자기 몫을 확보하는 현명한 길인 것이다. 이번 월드컵 축구가
한·일 공동주최로 열린다는 사실, 중국의 본선 진출로 축구에서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될 수 있는 기류가 보인다는 사실, 이 점이
나는 문화사적으로 적지 않은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슛, 골인”이라는 함성과 흥분과 희열과 열정이 새로운 문화
변동의 싹이 되길 비는 바이다.
유홍준/명지대 교수, 미술사학
